나의 이야기

첫사랑 예수님

Grace Woo 2015. 12. 1. 00:30

 

1973년, 종교감리교회의 청년부 부장 선생님을 따라

Ross목사님 자택에서 모이는 '예수전도단' 모임에 갔었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가스펠송을 접하고

자연스레 화음을 맞춰 부르는 찬양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방언으로 기도와 찬양을 드리며 은혜가 충만한 청년들의 모습에서

내가 모르는 신비의 세계가 있는 것이 느껴졌고

나도 그들처럼 성령세례를 받고 싶어서 

매주마다 빠지지 않고 화요모임에 갔었다.

 

 

이듬해에 전국연합대부흥회가 서울에서 열렸는데, 그 때

민박이 필요했던 전도사님 한 분을 어머니께서 집으로 모시고 왔다.

경상북도 용문산기도원 마을에서 오신 분이었다.

그리고 어느날 밤,

아버지께서 술을 많이 드시고 들어오셨는데

몹시 고통스러워 하셔셔 한밤중에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식구들은 모두 안방으로 모였고 전도사님도 따라 들어오셨다.

아버지께서 다급하셨던지 전도사님의 다리를 붙들고는

마귀들이 둘러싸고 빙빙 강강술래를 돌면서

아버지를 죽이려고 한다고 살려달라고 하셨다.

 

전도사님은 큰 소리로 사탄을 물리치는 기도를 하셨고

곧이어 우리에게 다같이 찬송가를 부르자고 하셨다.

그때, 아버지께서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찬송을 불러달라고 하셨다.

우리가 그 찬송가를 찾으며 뒤적이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급하셨던지,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고통스런 목소리로 몇장이라고 알려주셨다.

찾아보니까 맞았다.

 

아버지는 이북 평양에서 장로님의 아들로 태어나셨지만

월남하신 이후로 교회에 다니지 않으셨고,

그당시 교회에 열심이던 어머니를 못마땅해 하셨다.

그런 아버지가 개편 찬송가의 번호를 아실 리가 없는데..

신기하기만 했다.

 

전도사님이 다시 마귀와 씨름하듯 힘써 기도하는 동안에

아버지의 안색은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마귀들이 떠나간 듯이 깊은 잠으로 빠져드셨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있는대로 일그려졌던

아버지의 고통스런 얼굴이 거짓말처럼 환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제서야 우리 모두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몹시 궁금했던 나는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가,

일어나자마자 아버지께 그 찬송가가 몇장인지부터 물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시며

전날 밤에 일어난 일들을 도무지 하나도 믿지 못하셨다.

 

그 때, 나는 '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 후 몇달이 지난 뒤, 친한 친구 하나가 찾아와서

힘든 사정을 털어놓으며 기도원에 가고싶다고 했다.

나는 그 전도사님이 계시는 기도원이 생각났고

우리는 경상북도에 있는 용문산 기도원을 찾아갔다.

 

고속버스에서 내려서 용문산행 버스로 갈아타고,

울퉁불퉁 외길을 아슬아슬하게 돌고돌며 산으로 올라가는데

커브를 돌 때마다 깊은 벼랑 아래로 굴러떨어질 것만 같아

도착할 때까지 내내 가슴을 조였었다.

 

그날 밤, 우리는

전도사님의 권유로 용감하게 산에서 철야기도를 했다.

전도사님은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겠다고 하셨다.

 

기도할 줄도 몰랐지만 우리는

밤새도록 부르짖으며 하나님을 찾았다.

성령님을 사모하는 간절함이 우리에게 있었다.

 

드디어, 새벽 무렵이 되어

그토록 사모했던 성령님이 우리에게 찾아와 주셨다.

형용할 수 없는 평강이 신비스럽도록 가슴을 채웠고

기쁨이 한없이 솟아오르며 세상이 완전히 달라보였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이다.

 

싱글벙글 버스를 타고 산을 내려오는데, 올라갈 때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느꼈던 두려움은 온데간데 없고

그대로 떨어져서 하나님께로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죽음이 하나도 두렵지가 않았다.

순교자들이 담대하게 죽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크고 작은 기적들을 많이 보여 주셨다

 

병고침의 기적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만난 하나님을 전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순교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기도했다.

 

그렇게 여러 달이 지나고..

언제부턴가 내 양쪽 다리가 교대로

항아리처럼 빵빵하게 부어오르며 감각이 없어져서

검사를 받아보니 '급성 류마티스관절염'이라고 했다.

정형외과 선생님이 약을 처방해 주면서

'류마티스 관절염은 완치가 없다고

평생 관리를 잘 해야 한다'고 했다.

 

약을 먹어도 상태는 좋아지지 않고

무릎은 점점 뻑뻑해져서 굽힐 수가 없게 되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은 생각지도 못하게 되었다.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할 생각에 절망을 느꼈다.

 

병든 딸을 지켜보며 마음이 많이 아프셨던 아버지께서

'만일 하나님이 혜경이의 병을 고쳐 주신다면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셨다.

 

어느날, 권사님 한분이 심방 오셔서

순복음 교회의 오산리 금식기도원에 가면

병고침 받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번 가보라고 하셨다.

나는 순복음교회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기도원을 찾아갔다.

 

숙소를 정하려고 방마다 기웃거리다가

또래의 젊은이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대부분 병고침을 받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는데

한 자매님은 20대 중반의 당뇨병 환자로 3일째 금식을 하고 있었다.

나는 금식은 할 생각도 못했다.

의사가 잘 먹어야 된다고 했으므로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무릎을 구부리지 못해서 두 다리를 뻗은채로 앉아 예배드리며

나는 구경꾼처럼 병자들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3일째 되는 날 오후였다.

예배당 종소리를 듣고 성전으로 가고 있었는데,

저만치서 당뇨병 환자의 그 자매님이 나를 보고는 달려와서

나의 두 팔을 덥썩 붙들고 부르르 떠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내 병을 고쳐주셨어요!

방금 오빠가 와서 당뇨 테스트를 했는데 당이 하나도 안 나왔어요!

하나님께서 자매님의 병도 고쳐주실 거예요.'

 

그녀의 손을 통해서 온 몸에 전율이 찌르르 전해져 왔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생각했다.

그 자매님은 5일 금식하고 고쳐주셨지만,

나는 오늘 밤 철야기도 한방으로 끝내자!

하나님께서 내 병도 고쳐주실 것이다!

 

어디서 그런 믿음이 생겨났는지.... 

나는 숙소로 되돌아가서 짐을 챙겨가지고 성전으로 갔다.

그날밤 나는 하나님께 내 병을 고쳐내시라고

무작정 떼를 쓰고 울부짖으며 밤을 꼬박 새웠다.

 

어느덧 새벽집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날 새벽기도의 성경말씀은 내게 주신 말씀이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 이사야 40:31

 

그 때는 뒷부분의 말씀만 귀에 번쩍 들어왔다. ㅋ~

 

설교가 끝나고 목사님께서 안수기도를 해주시겠다고

3일 이상 금식한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하셨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고 나도 거기에 끼어 섰다.

내 차례가 되자 목사님께서 며칠 금식했는지 물으셨다.

나는, '한끼도 금식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내 병을 고쳐주실 것을 믿는다'고 확신있게 말했다.

 

목사님께서 큰 소리로  '아멘!' 하시더니

방언으로 병마를 물리치는 기도를 해 주셨다.

아~ 그 때..

하나님께서 내 병을 고쳐 주셨다.

성경에서만 나오는 줄 알았던 병고침의 기적이 내게도 일어난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기적을 베풀고 계시는 것을 알았다.

 

 

내 불치병이 나은 것을 보시고

그때부터 아버지께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셨다.

우리 집에는 가정예배가 시작되었고

다섯 식구 모두가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며

날마다 은혜가 넘쳐흘렀다.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위한 내 기도를 들어주시기 위해

나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며 기적을 베풀어주신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고난인 줄 알고 절망했었는데..

그 고난이 축복의 통로였던 것이다.

 

그 후 40 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류마티스 관절염은 한번도 재발한 적이 없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장 18절)